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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요약

배명훈, SF 작가입니다

배아줄기세포 2022. 3. 26.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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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은 제가 접한 첫번째 한국SF입니다. 흔히 SF하면 생각나는 우주이야기도 물론 들어있었지만, 일상적인 소재를 가지고 쓴 SF를 보고 꽤나 충격을 받았습니다. 또 '아, 나도 이런 소설 쓰면 재미있겠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 뒤로 SF에 관심이 생겨 영화 '컨택트(2016)'의 원작이라던 테드 창, '당신 인생의 이야기'와 켄 리우의 '종이 호랑이'('상태의 변화' 에피소드 진짜 재밌습니다.)를 읽고는 더더욱 SF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SF를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

 

  한편, 창작욕을 배출할 곳이 필요했던 저는 웹소설을 쓰는데도 관심이 생겨 관련 서적들을 찾아보던 도중 'SF 작가입니다(배명훈)' 라는 책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차례를 봐도'SF 작가의 생계에 관한 이야기겠네, 수익은 어떻게 내는건지 구경해보자'는 마음으로 대출을 했습니다. 책을 읽어나가면서 뜻밖의 보물을 발견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배우신 분의 깊은 통찰력

  'SF를 쓰는 데 도움이 되는 전공이 있다면 어떤 것일까? 국제 정치학이다.' 라는 자기 전공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책. 그 전의 프롤로그부터도 범상치 않은 글솜씨라고 생각했는데, 첫 챕터를 읽으면서 '나는 왜 세상을 배울 수 있는 국제 정치학을 전공하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를 할 정도로 설득당해버렸습니다.  

 

그 외에 나오는 '미국 중심 SF판에서 한국을 공간적 배경으로 쓴다는 것'에 대한 고찰. '세계'와 '세상'에 대한 본인만의 정의 등 많은 통찰들이 있지만 그 중에 제 무릎을 탁 치게 만들었던 부분은 'SF의 미학'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SF 작가입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배명훈, SF 작가입니다.

SF의 미학

'SF와 판타지는 어떻게 다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핵심은 '미학적 도구'의 차이인데 판타지는 이유 없이 열광(드래곤 등에)하는 즐거움을 활용할 것인가, SF는 반대로 열심히 설명하는 즐거움(왜 드래곤이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을 활용한다고 합니다. '작가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 현상을 설명하는 태도'가 SF의 핵심적인 미학적인 도구라는 것입니다. 판타지의 '신화', '예언'과는 다르게 과학적 사고에 의한 설명 혹은 최소한의 합리성을 유지한 채 하는 설명이여야 합니다.

 

이 때 주의할 점이 몇 가지 있는데,

첫째, 장르의 축적을 무시하는 것. - 긴 세월동안 비슷한 소재로 작가들이 하는 생각은 비슷할 수 있으므로, 기존의 작품들을 알고 있어야 '내 딴에는 참신한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있는 내용' 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인식과 달리 SF는 발상의 참신함에 모든 것을 거는 문학은 아니기 때문에 '참신함'만 자랑하지 않으면 망신은 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둘째, 신기한 일 여러개가 한 작품안에 일어나는 것. - 아무리 설명할 수 있더라도, 특이한 설정이 한 작품에 여러개가 있으면 척 봐도 문제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기타 인상깊은 문장들

학문하는 태도는 SF의 오랜 친구이자 유용한 도구다. 일상과 직관을 넘어서는 지적 도구와 그로 인해 펼쳐진 세계의 또 다른 면모에 매료된 사람들이, 그 놀라운 감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 어렵사리 꺼내든 도구. 그것이 바로 내가 아는 SF다.
SF작가에게 필요한 자질은 막스 베버의 책을 막힘없이 읽어내는 독서력이 아니라,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것을 다양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적용하는 말랑말랑한 사고력이다.
SF는 과학소설이지만, 과학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겨올 필요는 없다. 과학의 무게에 짓눌려서도 안 된다. 소설 바깥, 즉 현실 세계의 과학자는 고개를 젓더라도 작품 안에 등장하는 과학자가 타당하다고 판단하기만 하면 그만이라는 말도 있다.

  이처럼 읽는 내내 감탄이 나오는 통찰에 작가 개인 프로필을 찾아봤더니, 그냥 정치외교학과가 아니라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나오셨고, 석사과정까지 밟으신 분이였습니다. 역시 배우신 분은 다른 것인가.

지금은 국회의원이 되신 '김웅, 검사외전'을 읽었을 때는 '자기가 아는 내용 몽땅 때려박아 잘난척한다'는 느낌을 받았었습니다. 맥락과도 상관없이 때려박다 보니 '아 이게 이 양반 밑천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책은 공부를 오래 하신 분에게서 내츄럴하게 흘러나오는 지성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쓰시는 소설처럼 이 책도 공들여 쓰셨겠지만요.

 

  책을 다 읽고 최근에 본 'SF 명예의 전당: 전설의 밤'을 보고 왜 계속 읽어나가기가 버거웠는지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6.25보다 이전의 옛날 소설이라 그런지 대부분의 무대가 '우주', '미래'였습니다. 그렇게 넓은 세계관은 제 뇌가 받아들이기 힘들 뿐더러, 읽었던 책의 앞의 세 이야기에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설명이 생각보다 단편적이였거나 허술했던 것 같습니다. 

 

배명훈 작가님의 소설과, 다른 한국 SF작가들의 작품을 더 찾아보고 싶게 만든 책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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